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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70%가 어려움을 호소하는데 경기가 회복을 할 수 있는지 의문.

 

부론을 읽은 건 내가 스무살도 되지 않았을 때인 1980년 봄이다.

막 10·26이 발생하고 12·12로 계엄사령관이던 육국참모총장까지 구금이 된 상황으로 정치계에서는 연일 서울의 봄을 외치며 민주화가 이루어진 거처럼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세 정치인의 기사가 매일같이 새로운 이슈가 그리도 많은지 신문을 도배하던 무렵이다.

당시엔 문고판 책들이 있었는데 삼중당이나 을유문화사가 대표적인 문고판 책들을 발간했던 거로 기억된다. 가격이 저렴했던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은 돈이 없던 가난한 집안의 둘째로 중학교도 진학하지 못한 채 사회로 나와, 막 사춘기를 거치는 단계에서 또래들이 막 동복을 춘추복으로 갈아입고 내가 일을 하던 앞을 등하교 시간이며 지나치는 걸 부러운 시선으로 보는 날 깨닫고부터다. 이틀 먹고 사흘을 굶는 그런 절박한 시절을 보내야했던 난 학교에서 우등으로 졸업을 하면서도 중학교에 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또래들이 학교를 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날부터 약간의 돈만 생기면 책을 사 본 것이다.

다양한 일을 배우고 했지만 가장 오랜 세월을 내가 한 일은 봉재다.

사진은 제작년 년말 서울에서 작게 봉재를 다시 시작한 뒤 연초 봄상품을 디자인 할 때다.
저녁시간 패턴작업을 하던 중 가끔 책을 보내주는 후배인 안중찬이 제수씨와 함께 사무실을 찾아와 저녁식사를 한 뒤 의견을 나누러 사무실로 돌아와, 원단 가게들이 신상품을 한 번 만들어 보라며 보낸 데님원단을 살펴보는 도중 후배가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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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실린 사진의 옷은 지난 해 직접 디자인을 하고 패턴작업과 봉재를 한 상품들 중 일부란 걸 미리 밝혀두고 이제부터 본격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1980년대 말부터는 제법 많은 상품들이 시장에서 유통을 할 수있게도 했었다. 레깅스나 속칭 고리바지라는 스판소재로 만든 여성들의 바지도 만들어 한 때는 시장에 온통 그런 상품들이 넘쳐나게도 만들었다.

심지어 할머니들까지 다로 자신의 몸에 맞춰 만들어 달라고 개인적으로 찾아와 주문을 할 만큼 알려도 ?었던 시절이다. 하는 일마다 성공을 거둬 제법 많은 돈도 만지고 규모도 커졌으나 고집스럽게 국내에서만 생산을 하던 난 1992년 부도를 맞고 말 그대로 빚더미에 앉았다.

가장 쓰라린 경험이다.

그 이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봉재상품을 수출하던 국가에서 수입국으로 변신하여 시장구조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한동안 빚을 갚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하루 두 곳 이상의 공장을 돌며 미싱이나 다양한 봉재용 특종 기계로 하는 작업을 일당을 받으며 일 했다. 빚을 청산하고 1993년 겨울로 접어들면서 설악산으로 들어와 양폭산장에서 산장을 관리해주며 겨울을 보냈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다.
1994년 다시 서울로 올라가 웨딩드레스를 제작하는 일을 했다.
시간은 그 무렵부터 정말 쏜살같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건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요 조급함 때문으로 생각된다. 웨딩을 제작하던 업체에서 다시 일반 패션제품으로 사업방향을 전환시켜 제법 탄탄한 구조로 회사를 만들어놓고 난 뒤 2000년으로 들어서서야 봉재를 손 뗐다. 고향으로 돌아온 해가 2001년이다.

나이 40이 되어서야 연어처럼 고향으로 돌아올 때만 해도 IMF다 뭐다 해도 난 그런 상황과는 달리 자신감이 넘쳤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실업자로 전락하고, 기업이 도산하는 상황을 보면서도 그저 남의 일로만 여겼다.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 IMF가 발생한 직후 하이디하우스의 차홍렬 촌장님과 인테리어를 할 공구 몇 가지를 구입하려고 동대문을 나갔다. 종묘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밖으로 나오다보니 많은 남자들이 벤치(bench)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오후 3시 무렵인데 왠 사람들이 일을 하지않고 이렇게 낮시간에 공원에 놀러나왔나 궁금해, 바라보며 걷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신문이나 생활정보지를 보고 있었다.

그랬다.

그들은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노숙자로 전락한 이들이나,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실을 가족에게 밝히지 못하고 출근을 하는 척 아침에 나와 거리를 배회하며 저녁시간을 기다리는 이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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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임조니 분업이니 하며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언제적 이야기냐 싶게 사회는 급속히 변했고, 정권의 실정으로 나라가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가장들은 일자리를 잃고, 가족은 가난의 나락으로 전락하고 만 그 암울한 시기가 벗어나면 모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리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국부론에서 내가 배웠던 방식과는 다른 정책들이 늘 나오고 실패를 거듭하며 다시 난관에 부딛치며 많은 이들을 시름에 겹게 만들었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생산자들이 바로 소비자다.

그런 한국의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어버려 실업인구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소비를 독려하는 정부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는 것이다.

유명 패션업체들이 대부분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제품을 만들어 국내로 들여오고 있다.

국내에서 더 이상 인건비 때문에 감당할 수없어 이전을 한다는 말을 하면서 그들은 생산설비와 고급기술인력을 송출했다. 바로 그들이 인건비 운운하던 생산인력이 이 나라의 근간인 소비계층이라는 사실을 묵과한 처사다. 시장엔 상품이 넘쳐난다. 하지만 경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말을 한다. 바로 소비자들의 주머니가 빈 까닭이다.

 

전국 어느 고장을 가던 택시와 서비스업종만 날로 늘어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문을 닫거나 일자리를 찾아 헤맨다.
이게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서브프라임이니, 모기지론, 키코, 펀드 등의 용어들이 마치 경제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고 그걸 모르면 시대에 뒤 떨어지는 일이기라도 하는듯 호들갑스러운 기사들을 보며, 그들은 언제 또 말을 바꿀 것인지 사뭇 궁금하기도 한다. 기본에 충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 뱉는 그런 말들에 속아 투자를 한 이들은 지금 거의 전멸하다시피 쪽박을 차고 거리로 나 앉게 생겼지만 책임을 지고 나서는 경제인이나
은행이 어디 하나나 있던가. 내게도 펀드를 들라고 하던 은행원이나 보험판매원도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주장은 하나도 실패할 일이 있다는 말은 없고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고 금방이라도 거부가 될 거처럼 말 한다.
웃기는 이야기고 까는 소리다.

그걸 그대로 보도를 했던 기자들도 같이 까고 놀았던 놈들이다.
그 놈들이 이젠 나서서 반대로 비토를 한다.
완전 코메디 아닌가.

정부의 실정도 문제지만 국민들도 모두 책임을 통감해야 할 일이다. 일자리와 소비는 어느 게 먼저란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일자리가 없는 사람은 주머니가 비었으니 원하는 물건을 살 돈이 있을 턱이 없고, 소비가 없으면 결국 생산은 이루어지지 못하니 일자리는 줄어들 게 된다.

악순환의 블랙홀로 빠져든 경제는 이 뫼비우스의 고리에서 헤어날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일전에도 글에 썼듯 난 이 일을 하며 불과 1년 사이에 예전 20년이란 세월에 겪던 일들보다 더 심한 일들을 겪었다.

중국에서 천 몇 백원에 제작을 한 티셔츠를 들여와 라벨만 명품을 달아달라고 오는 사람도 있다. 인터넷쇼핑몰을 운영한다는 그들에게 난, 라벨은 달 수 있는데 1장 작업을 하는데 5천원 이상을 주면 달겠다고 했다. 그들이 그 가격으로 일을 할 수는 없으니 그대로 돌아서 간다. 누군가 그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게 시중에서는 명품으로 팔린다.

 

이상한 시장구조다.

명품 라벨만 붙으면 그게 아무리 조악하고 형편없더라도 유행이고 잘 팔린다.

제 아무리 잘 만든 상품도 국산은 시장에서 제 값을 못 받는다.

 

일자리가 없게 만든 것은 소비자의 책임도 크다.

소비자가 누군가?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 스스로 일자리가 없게 만들고 이제는 돈이 없어 소비를 할 형편이 되지 못한다.

기업의 생산자와 노동자, 농민 등 다양한 사람들이 저소득계층으로 분류되는데 그들이 이 나라 국민의 80%에 이르는 상태에서 실업율은 날로 높아만 진다. 관광과 서비스업 등으로 그 인력을 모두 일자리를 만들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무언가 많은 고용인력을 늘릴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한데, 결과적으로 생산기반을 늘리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있겠느냐는 숙제가 남는다. 일자리 없는 서민이 소비자인 세상에서 소비는 일어날 수 없고, 결과적으로 경기회복이란 말은 요원한 꿈은 아닌지 고민을 해야 한다.

많은 고용을 필요로 하는 사업이 만들어지지 않고서는 경기는 획복불능에 빠지고 만다.

정부가 만들겠다는 일자리가 과연 제대로 사회를 움직이고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농업도 더 이상 지금 상태로 노인들의 일거리로만 생각해서는 오래가지 않아 수입에만 의존하게 될 것이고, 국가는 물가의 폭등으로 국민들을 도탄에 빠지게 만들 것이다.

 

그저 외국의 어느 여배우나 뒤 ?고, 연예인들의 얼굴이나 처다보며 환호를 한다고 해결 될 문제도 아닌 상황에서 매일같이 가십성 이야기들이 쏟아지고, 그걸 안 보고 모르면 시대에 뒤 처지는 걸로 생각하고는 변할 수 없다.
먼저 기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증권을 모르면 바보인가?
기름값 오른다고 늘 투정을 부리며 대중교통을 이용할 생각은 없다.
먹고 살기 힘들다며 애완견 사료값 오를까 더 걱정인 나라다.
흠집내기는 국회의원들 전유물인 줄 알지만 실제로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까 놓고 이야기 해서 난 이명박이 안 찍었다.
그런데 이명박만이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난리를 쳤다. 그러곤 죽겠다고 후회를 하고 성토를 한들, 앞으로도 4년 이상 그가 이 나라를 망치던 말아먹던 이미 주권은 그에게로 건네졌다.
그런 바보짓을 하지 말아야 기본이 선다.

이제 우리부터 변해야 산다.
이게 2010년 이후를 대비하는 국부론의 원리다.
내가 생산한 것을 먹고 난 뒤 남은 잉여 상품을 시장에 팔고 그 재화로 더 많은 양질의 상품을 만들어 부를 축적하는 게 건전하고 건실한 국가와 사회, 가정의 구조다.


 

 

농민과 서민이 더불어 나누는 함께살기를 이야기 한 글은 아래 제목을······

 

태풍이 잠잠해 맞은 풍년으로 우는 농심을 보며! ◁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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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의 ‘태풍이 잠잠해 맞은 풍년으로 우는 농심을 보며’를 블로거 기자 여러분과 네티즌들이 함께 동참하여 농민과 함께 역경을 헤쳐나가는 운동으로 전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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