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내내 소리치면서도 막막함을 거둘 수 없는 건 이명박이 대통령이라서가 아니라, 이명박이 물러나도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때문일 것이다. 진보적이라는 사람치고, 오늘 이 지랄 같은 현실을 만들어내는 진짜 적이 신자유주의라는 걸 부인할 사람이 있겠는가. 문제는 이놈의 신자유주의와 싸운다는 게 도무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신자유주의가 적으로 삼고 싸우기엔 지나치게 광범위하다는 점이다.
언론을 예로 들어보자. 대개 조·중·동을 보수 신문이라 말하고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진보 신문이라 말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한겨레>나 <경향신문>은 조·중·동과 달리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비참을 이야기하지만, 신자유주의 자체에 대해선 ·거부할 수 없는 전지구적 현실·이라는 견해에 머문다. '사수해야 할 공영방송' KBS나 이명박 정권과 긴장을 이룬다는 MBC도 나은 건 없다. 두 회사의 몇몇 피디들이 '준 방송 사고' 형태로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비참에 대해 간간히 이야기하는 정도다. 이쯤 되면 신자유주의와 싸운다는 건 '존재하는 모든 것'과 싸우는 것처럼 느껴진다.
신자유주의와 싸운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그놈의 신자유주의가 어느 새 우리 안 깊이 들어와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교육 문제를 보자. 신자유주의 교육과의 싸움은 이명박의 시장주의 교육과 싸우는 것은 물론, 아이를 시장주의 교육에 실어 보내는 나 자신과의 싸움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데 그게 어디 쉬운가. 그래서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은 대개 이명박의 시장주의 교육 정책은 욕하면서 내 아이의 시장 경쟁력은 알뜰하게 챙기는 '자못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생존 자체가 숙제인 시대에 누가 그걸 정색을 하고 비난할 수 있으랴만, 이명박 쪽에서 보면 참 꼴이 우습긴 할 것이다. 소리 높여 시장주의 교육 정책을 성토하는데, 정작 제 새끼 교육시키는 모습은 저희들과 딱히 다를 게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빌어먹을 사교육 사업의 주역들은 모조리 386 운동권 출신들이다.
하여튼 그런저런 추레한 사연들 속에서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라는 진짜 적과의 싸움은 '비현실적인 싸움'으로 접어두고, '좀 더 구체적인 싸움'이라는 미명 하에 이런저런 '대체된 적'과의 싸움에 몰두하곤 한다. '조·중·동'이 그렇고 '수구반동'이 그렇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구호가 그렇다. 그리고 이명박은 그 대체된 적의 백미다. 이명박이야말로 오늘 진보적이라는 사람들, 즉 우리가 아무런 마음의 불편 없이도 비장하고 순정한 얼굴로 마음껏 욕할 수 있는 '70년대(혹은 80년대) 스타일'의 적인 것이다.
물론 사회 진보를 위한 노력이란 원칙과 당위만 주장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변화를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 1980년대를 돌이켜 보면 지나치게 거대담론만 강조하느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부분에서 결핍과 오류가 너무나 많았다. 한국의 진보 운동은 그 뼈아픈 경험을 반성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던가. 그러나 오늘의 문제는 거대담론 편향이 아니라 정반대로 '거대담론의 결핍'이다.
문제의 근본과 얼개를 말하는 건 모조리 '거대담론 혐의'를 받는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말하는 건 모조리 비현실적인 소리로 치부되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만날 똑같은 소리만 하는 관념론자'로 낙인찍힌다. 이런 상태에서 이른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만 갈피없이 즉자적으로 강조되다 보니, 정작 오늘 한국의 사회 진보 운동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어떤 세상을 꿈꾸는 것인지가 사라져버렸다.
![]() |
최근 문서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