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my222.net/zbxe/292463이 소설을 읽기 전에 우리는 시간과 공간적인 배경을 약간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간적인 배경은 남러시아 돈강 유역의 카자흐 마을 타타르스키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고향도 바로 그 곳 돈강 유역이다.
시간적인 배경은 러시아 혁명기라고 할 수 있겠다. 더 나아가 이 혁명의 배경도 풀이가 필요한데, 러시아의 근대화는 19세기 중반 크림전쟁에서 패전국이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화의 첫발로 러시아는 농노해방을 단행하지만, 수십년간 지속되는 극심한 경제공항은 그들 해방된 농노들의 자유에 아무런 희열을 제공하지 못하게 된다. 자유는 있으되 중산계급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민중의 고통이 곪았다가 터지게 되는 것인데, 제1차 세계대전이 종반으로 치닫던 1918에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바로 그 핵심적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의 중심에 키 크고 잘 생긴 사나이, 그리고리 판테레레비치가 있다.
그의 할아버지 프로코피는 크림전쟁이 끝나고, 귀향 하면서 터키 여자를 아내로 맞아 데리고 왔다. 그렇게 카자흐와 터키인의 피가 섞여 아버지 판테레이가 나오고, 아버지는 일리니치나와 결혼하여 형 페트로와 우리의 주인공 그리고리를 낳았고, 아름답고 어린 막내 딸 두냐시카를 낳았다. 판테레이의 첫번째 며느리는 다리야가 되었으며, 억척스럽고 열심히 살아가는 멜레호프 가족이 이 소설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줄거리...겁 없는 청년 그리고리는 이웃 스테판의 아내 아크시냐와 불타는 사랑에 빠지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 판테레이는 이웃의 부농 '미론 그리고리에비치'의 맏딸 나탈리야를 며느리로 맏아 둘째아들을 강제로 결혼시켜 버린다. 다혈질의 그리고리는 마누라에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다가 그새를 못참고 아크시냐를 부추겨 함께 달아난다. 그들의 애정 도피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대지주 리스트니키 집안의 하인으로 정착하는 듯 싶었으나 오래지 않아 그리고리가 징집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것으로 변화를 맞게 된다.
그리고리가 전쟁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진정한 사나이로 거듭나는 동안, 아크시냐는 주인집 아들 에브게니와 바람이 나는데 돌아온 그리고리가 그 상황에 열받아 두 사람에게 제대로 응징을 가한다. 아크시냐와의 관계에 짜증이 난 그리고리는 아내 나탈리야를 다시 찾게 되고 두 사람은 새롭고 평온한 사랑으로 가정을 이룬다. 하지만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내전이 시작되고, 카자흐들은 혁명군을 맞아 전투부대를 편성하게 되며, 이미 전쟁에서 인정받은 용맹스런 그리고리를 반혁명군 부대장으로 추대한다. 체질이 평화주의에 가까워 누구 편도 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부대장 자리를 고사하는 그리고리를 대신하여 그의 형 페트로가 부대장이 되지만 반혁명군은 거듭된 전쟁에 환멸을 느껴 별다른 저항도 해보지 않은채 도망만 다니고, 그리고리 또한 본의 아니게 혁명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타타르스키 마을에서 당 세포조직을 만들다 체포되었던 전력이 있는 독일인 볼셰비키 슈토크만은 제8적군 정치부원으로 돌아와 마을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 넣는다. 슈토크만은 예전에 자신이 키웠던 미시카 코셰보이, 이반 알렉세에비치 등을 조정하여 반혁명분자를 색출하게 하고, 이러한 와중에 그리고리의 장인 미론 코르슈노프와 형 페트로가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죽은 형의 뒤를 이어 반혁명군을 이끌게 된 그리고리의 분노는 하늘을 찌른다. 적군을 향한 그의 분노는 불타지만 무고한 민간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하며 전쟁에 임한다. 하지만, 현실은 자꾸 그의 의지를 꺽고 꼬여 가기만 한다. 동족상잔의 아픔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볼셰비키, 왕당파, 중도파 그 누구에게서도 믿음을 기대할 수 없을만큼 비참한 현실에 절망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그리고리는 결국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며, 그 해답으로 사랑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동족상잔의 고통 속에서 믿을 건 사랑 뿐인가? 그리고리는 추억을 생각한다. 그리고리는 멀어져 간 사랑을 추억한다. 그 무렵 아크시냐는 에브게니에게서도 버림받고 전남편 스테판과 그럭저럭 살아가려고 노력중이었다. 스테판은 제1차 대전의 전쟁포로로 독일군에 잡혀갔다 어느 정도 재산을 갖고 돌아와 그녀를 다시 찾은 순애보로 이 소설에서 가장 불쌍한 케릭터 중에 한 명이다. 그리고리는 적어도 스테판에게 만큼은 잔인하디 잔인한 인물이었다. 그리고리는 다시 아크시냐를 부추겨 그녀의 마음에 불을 지피고 두 사람의 불타는 사랑이 다시 시작되고 말았던 것이다. 임신한 상태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고 다시 충격에 빠진 그리고리의 아내 나탈리야는 낙태를 시도하다가 죽음에 이르고, 그 죽음에 더욱 충격을 받아 괴로운 그리고리는 더욱 방황을 하게 되며 그리고리가 속한 반혁명군의 패색은 더욱 더 짙어만 간다. 이제 모든 현실이 짜증나고 싫어진 그리고리는 오로지 사랑을 위해 아크시냐와 떠나지만 아크시냐가 티푸스로 생사를 오가게 되자 불가피한 상황에서 그녀를 남에게 의탁하고 혼자서 떠난다. 누가 옳은지도 알 수 없는 민족의 고통스런 전쟁통... 내가 누구 편인지 그 소속도 갈팡지팡한 전쟁통에 이편 저편을 오가던 그리고리는 그의 전력을 문제 삼은 혁명군에서 강제 제대 당하고, 오로지 평범하게 살려는 일념으로 귀향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이제 행복해질만도 한데... 현실은 그를 결코 평범하게 살도록 놓아두지는 않았다. 그의 옛친구 미시카는 형 페트로를 죽인 원수인데, 이제는 귀여운 여동생 두냐시카를 아내로 맞아 매제가 되어 있었으며, 매제에게 쫓기는 그리고리는 고향을 떠난다. 다시 한 번 그는 의지와 상관 없이 반혁명 게릴라부대에 잡혀 전투에 참여하게 되지만 그의 마음은 전쟁을 초월하여 아크시냐와의 재회에만 뜻을 두고 있었고, 두 사람은 극적으로 재회하지만 총알 하나가 사랑하는 아크시냐의 숨을 끊어 버린다. 누구 편의 총알인지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절망의 사나이가 삶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 정처없이 헤매고만 있었다. 산송장이 되어 살아가는 그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꿈도 반 쪽으로 그를 맞이하며 2,000쪽에 달하는 대서사가 끝난다.
기억에 남는 명문들...가축에 짓밟힌 밀은 다시 일어난다. 짓밟혀 땅바닥에 쓰러졌던 줄기는 이슬을 맞고 햇볕을 받아 다시 일어난다. 처음에는 힘겨운 짐을 진 사람처럼 구부정하지만, 이윽고 똑바로 서서 머리를 치켜든다. 태양은 다시 전처럼 그것을 비추고, 바람 또한 옛날처럼 흔들어 준다······ 밤마다 정신 없이 남편을 애무하는 아크시냐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117쪽)
우리는 사실 장기의 말에 불과해, 말은 사람의 손이 자기를 어디에 놓아줄지 모르는 거야······ 예를 들면 나 같은 건 본부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안가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군 상층부 사이에, 즉 코르니로프, 루콤스키, 로마노프시키, 크리모프, 데니킨, 칼레딘, 에르델리, 그 밖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 묵계와 뭔가 이야기가 진전되고 있는 듯 하다는 것 뿐이네······ (611쪽)
부엌에는 죽음의 정적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상하게 작은데다 너무나 마른 페크로가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코는 구부려졌고 갈색 입수염이 거무죽죽하게 되어버렸지만 얼굴 전체에 슬픈 빛이 어려 무척 아름답게 보였다. 아랫부분을 잡아맨 바지 밑으로 털북숭이 맨발이 비죽이 나와 있었다. 몸의 얼음이 차츰 녹기 시작하자, 몸뚱이 밑에 장밋빛 물 웅덩이가 생겼다. (1146쪽)
돈의 수면은 바람을 받아 거품을 일으키고, 암록색의 물결이 서쪽을 향해 달려 갔다. 그 물결은 물이 고인 곳이나 물가에 덮인 투명한 살얼음이 가장자리를 두들겨 부수고, 비단실 같은 물풀의 녹색 송이를 흔들어댔다. 물가에서는 얼음 덩어리가 서로
부딪쳐서 일으키는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물가의 자갈이 물에 씻기며 자르르자르르 부드러운 소리를 냈으나, 물결이 빠르고 단조로운 강의 중심부에서는 그리고리의 귀에 거룻배의 좌현에 떼지어 몰려드는 물결이 일으키는 물방울의 공허한 소리와 단속적인 물결의 수면을 때리는 소리와 돈강을 따라 숲속을 지나가는 그칠 줄 모르는 낮고 굵고 둔한 바람 소리만이 들려 왔다. (1813쪽)
아침에 그는 타타르스키 마을 건너편의 돈에 닿았다. 차오르는 흥분으로 창백해지면서 오랫동안 고향 마을을 바라보았다. (중략) 험한 절벽 밑에는 기슭의 얼음이 녹아 떨어져 물 위에 떠 있었다. 투명한 녹색 물이 바늘처럼 뾰죽뾰죽한 얼음덩어리 주위에
부딪혀서 그것을 부수고 있었다. (1940쪽)
가래로도 일구지 않았네, 그 이름도 드높은 우리의 땅은······
이름 높은 이 땅은 말발굽으로 일구어지고
이름 높은 이 땅에 뿌려진 것은 카자흐 머리
고요한 돈강을 수놓은 것이 과부라면 아버지인 돈강을 메우고 피는 건 고아들
아, 돈강 물결은 아버지 어머니의 눈물로 넘치네
오, 우리들 아버지 고요한 돈강
오, 고요한 돈강 어이하여 흐린 물결 흐려서 흐르는가?
아, 고요한 돈강 어이하여 물결 흐림 없이 흐를 수 없는가!
우리 돈강 물결 밑바닥에서 차가운 맑은 물이 솟아 나는데
우리 돈강 강물에 사는 은빛 물고기가 물 흐려 놓네.
(9쪽, 카자흐 노래)

톨스토이나 도스토 예프스키가 19세기 러시아문학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 놓았다면, 그 뒤를 이어 20세기 러시아문학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더불어 미하일 숄로호프가 완성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다른 슬프고 지리한 러시아 문학들과 달리 숄로호프의 소설을 경쾌함이 빠지지 않는다.
1905년생인 숄로호프가 스무살 때인 1925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928년에 제1권을 처음 발표하고, 1940년에 제4권이 완성될 때까지 무려 15년 동안의 시간을 투자한 대작 '고요한 돈강'은 수많은 수상의 과정을 거쳐 1965년에 노벨문학상의 영광에 이르게 해준 숄로호프의 대표작이다.
고요한 돈강에서 나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떠올렸다. 두 작품은 비슷한 면이 많았다.
동족상잔이라는 민족적인 비극이 혁명과 이념으로 버물려 지고 잘 포장되어 역사를 타고 흐르지만 그 내면에 감춰진 왜곡된 우정, 가족애와 거친 사랑... 어쩌면 소설 태백산맥에 많은 영향을 준 작품이 바로 고요한 돈강일지 모른다는 그런 상상을 해봤다.
이 책의 중간중간에 시처럼 노래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지만 테너든 베이스든 리듬감을 느끼지 못해 아쉬웠다. 내가 카자흐들의 노랫 소리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거나 그 이유로 이 책의 가치를 번역을 통해 접하는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주기는 벅찰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1980년대의 번역이라 시대를 쫓아오지 못한 문맥들이 옥에 티였으나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옮김이 있었다. 보통 책보다 큰 종이에 낭비가 없는 빼곡한 편집을 선택했음에도 무려 2,000쪽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의 소설인데, 매우 탄탄하게 두 권으로 분 권되어 큰 기쁨을 주었다. 아마도 평범한 출판사에서라면 5~600쪽의 책 5권 정도로 분권되어 가격도 2배 이상 비싸지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여유 될 때마다 월드북 시리즈를 구매하여 완독해 보고 싶어 졌다. 신세대적인 번역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부드러운 문체에 읽기 편했고, 가격도 경쟁력 있는 월드북 시리즈 96, 97권 고요한 돈강... 이 멋진 책을 편집하신 분들과 모든 동서문화사의 고정일 사장님께 무한한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 그냥 읽다가 눈에 띈 오타들 -
1198쪽12줄: 로소 → 비로소
1245쪽24줄: 일적 → 일찍
- 다음은 이 책이 1980년대 번역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흔적들 -
11쪽12줄: 크리미아전쟁 → 크림전쟁
560쪽15줄 상크트 페테르부르그 → 레닌그라드
560쪽16줄 레닌그라드 → 상트페테르부르크
1323쪽18줄: 국민학교 → 초등학교
1324쪽1줄: 국민학교 → 초등학교
1808쪽14줄: 크리미아 → 크림